용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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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인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중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7~8만 명의 조선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군 1,600명에게 패배한 전투이다. 조선군은 신립의 패배 이후 남부 지방 병력을 모아 반격을 시도했으나, 지휘부의 갈등과 전략 부재, 이광의 무리한 공격 감행으로 인해 와키자카의 기습에 대패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했으며, 이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용인 전투는 조선이 전쟁 초기에 주도권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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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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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임진왜란 |
일부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7월 13일 (양력); 1592년 6월 5일 (음력) |
장소 | 조선 경기도 용인시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일본 |
지휘관 | |
조선 | 이광 곽영 윤선각 김수 권율 백광언 이지시 이지례 황진 |
일본 |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 |
병력 규모 | |
조선 | 60,000명 |
일본 | 1,600 ~ 1,900명 |
사상자 | |
조선 | 1,200명 |
일본 | 알 수 없음 |
관련 정보 |
2. 배경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복을 위한 길로 삼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그의 군대는 조선군에 맞서 초기 성공을 거두어 한성부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가능한 한 빨리 한성부에 도달하기 위해 전라남도를 우회했다.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맹장 신립이 크게 패하자, 전라감사 이광은 4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2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용인에 집결하여 총 7~8만에 달하는 남도 근왕군을 편성하였다.[8][9][10][11][12][14][15][16] 이들은 스스로를 10만이라고 칭하며 사기를 높였다.[17][18][19]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병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합류하였다.[13]
음력 6월 4일 벌어진 초기 소규모 전투에서 김수 등이 적 5명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13]
용인은 수원 근처에 있던 일본군의 통신 요새였으며,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키고 있었다.[5] 전라남도 관찰사 이광은 반격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공격했다.[4][5]
2. 1. 조선의 상황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복을 위한 길로 삼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그의 군대는 조선군에 맞서 초기 성공을 거두어 한성부를 점령했다.[4]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맹장 신립이 크게 패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4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2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용인에 집결하여 총 7~8만에 달하는 남도 근왕군을 편성하였다.[8][9][10][11][14][15][16] 이들은 스스로를 10만이라고 칭하며 사기를 높였다.[17]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병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합류하였다.[13]음력 6월 4일 벌어진 초기 소규모 전투에서 김수 등이 적 5명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13]
2. 2. 일본군의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복을 위한 길로 삼기 위해 1592년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조선군에 맞서 초기 성공을 거두어 한성부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가능한 한 빨리 한성부에 도달하기 위해 전라도를 우회했다.[4]용인은 수원 근처에 있던 일본군의 통신 요새였으며,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키고 있었다.[5]
3. 전개 과정
7월 13일(음력 6월 5일), 조선군 지휘부는 작전 회의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광주 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모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먼저 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광은 군율을 어기고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왜군을 공격하게 했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라고 재차 경고했으나, 백광언은 적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공격에 나섰다가 선봉장 이지시,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와 함께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3]
맹장이었던 백광언과 이지시가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권율의 경고와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광은 정찰도 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와키자카의 군대는 반격과 매복을 통해 조선군을 격파했다.[3] 7월 14일(음력 6월 6일), 조선군은 식사를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고,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주하였다.[3]
3. 1. 지휘부의 갈등과 전략 부재
조선군 지휘부는 작전 회의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광주 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모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먼저 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도 했다.그러나 이광은 군율을 어기고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7월 13일(음력 6월 5일) 왜군을 공격하게 했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라고 재차 경고했으나, 백광언은 적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공격에 나섰다가 선봉장 이지시,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와 함께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3]
맹장이었던 백광언과 이지시가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권율의 경고와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광은 정찰도 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와키자카의 군대는 반격과 매복을 통해 조선군을 격파했다.[3]
3. 2. 용인 전투의 경과
음력 6월 5일, 백광언과 이지시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과 매복으로 인해 전사하였다.[3] 음력 6월 6일, 조선군은 식사를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주하였다.당시 장수들은 작전 회의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광주 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먼저 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은 군율을 어기고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의 1000명의 군사들과 합세해 음력 6월 5일 왜군을 공격했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백광언은 적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공격했다가 선봉장 이지시,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와 함께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맹장이었던 백광언과 이지시가 죽자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음력 6월 6일 군사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할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하여 크게 패했고,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망쳤다.[3]
4. 결과 및 영향
조선군 7~8만 명은 1,600명의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호성감 이주는 선조에게 용인에서 삼도 근왕병이 প্রায় 8만에 달했다고 보고했다.[20] 당시 사관의 기록인 기재사초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 경상도 관찰사 김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 등이 이끈 8만 군대가 양떼처럼 행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8만 대군은 패배 후 흩어져 굶어 죽는 이가 많았다.[21] 그러나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고, 일부는 재합류하거나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광은 파직 후 고문을 받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명성을 얻었다. 황진은 부대를 온전히 보존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봄놀이 같았다'라고 평가했다.
4. 1. 조선 측 피해
조선군은 7~8만에 달하는 병력 중 상당수를 잃었다. 기재사초에는 8만 대군이 궤멸된 후 무수히 굶어 죽어 3만 명만 살아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1] 이들이 버리고 간 군수품은 개울과 골짜기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47]총지휘관이었던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고문을 당한 후 유배되었다.[6] 반면, 광주 목사 권율은 휘하 부대를 수습하여 이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고, 황진 또한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 채 퇴각하였다.
4. 2. 일본 측 영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20]4. 3. 전쟁에 미친 영향
용인 전투와 임진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조선 선조가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 이로 인해 조선은 자체적인 힘으로 도성을 회복할 기회를 상실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비록 조선군은 1593년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을 탈환했으나, 전쟁 기간 동안 6만 명 규모의 대군을 다시 편성하지 못했다.[6]
4. 4. 역사적 평가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용인 전투를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라고 비판하였다.[20] 일부 역사학자들은 용인 전투의 패배를 조선이 전쟁 초기 주도권을 잃고 장기적인 고전을 겪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한다.[6]용인 전투의 패배는 임진강 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선조가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도록 만들었다. 역사학자 김갑동은 용인에서 조선 구원군의 괴멸을 조선이 주도권을 되찾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희망을 꺾어버린 사건으로 묘사했다.[6]
비록 조선군은 1593년 행주산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서울을 탈환했지만,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한 번도 6만 명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다.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은 자신의 저서 '문수만록'에서 이 때 일을 "우리들은 백면서생으로 병가의 일을 알지 못하여 규모와 계획이 몹시 졸렬해서 마침내 이런 실패를 당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원통하나 어찌하랴."라고 회상하였다.
이광은 이 패전으로 인해 선조에게 끌려가 죽을 정도로 고문을 당해 몸이 망가졌다. 많은 조선 장교들이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율과 황진은 질서 있게 후퇴하여 흩어진 생존 병력을 모아 이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전라도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일본군의 통제 밖에 놓이게 되었다.
5. 기타
===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 전투에서의 승리를 언급한다.[1]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조선군 지휘관들에게 강력한 적으로 인식되었다.[1]
=== 인구 손실 ===
5. 1.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 전투에서의 승리를 언급한다.[1] 영화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조선군 지휘관들에게 강력한 적으로 여겨진다.[1]5. 2. 인구 손실
참조
[1]
서적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1
[2]
서적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1
[3]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4]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5]
서적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1
[6]
서적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1
[7]
문서
선조실록,기재사초 기재잡기,연려실기술
[8]
문서
기재사초
[9]
문서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10]
문서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11]
문서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
[12]
문서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
[13]
문서
상촌집 ,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
[14]
문서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호성감 이주를 인견하고 고경명의 사망, 승군의 활약 등을 묻다
[15]
문서
기재사초
[16]
문서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17]
문서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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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기재사초
[19]
문서
국역 장양공전서 2권 자헌대부 이조판서 이재의 이공행장
[20]
문서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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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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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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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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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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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1일 기유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삼남의 감사가 수원에 진을 치고 조정의 지휘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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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병진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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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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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구
[34]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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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36]
문헌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37]
사료
기재사초
[38]
문헌
수원의 적은 대군이 갑자기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 용인의 적과 합쳤다.
연려실기술
[39]
문헌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1일 기유 2번째기사
[40]
서적
문수만록
[41]
문헌
연려실기술
[42]
문헌
연려실기술
[43]
문헌
일월록
[44]
문헌
기재잡기
[45]
문헌
연려실기술
[46]
문헌
연려실기술
[47]
문헌
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48]
서적
상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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